우리 역사에서 고조선 이전에 존재한 국가가 있나요?
신시 배달국이 중국 사서에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
중국인들이 역사를 쓰는 고유 필법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중국에 영광스러운 일은 한껏 부풀려 쓰면서 수치스러운 일은 감춘다, 중국은 높이면서 주변 나라는 깎아내린다, 중국사는 상세히 쓰면서 이민족 역사는 간략하게 적는다, 이 세가지 원칙인데 표면적으로는 대의명분을 밝혀 세우는 역사 서술법이지만 사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충실한 필법이다. 자신들의 역사가 동이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역사 콤플렉스를 이 춘추필법으로 덮으려 한 것이다.
공자(孔子)의 춘추필법(春秋筆法) - 중국의 역사 왜곡 존화양이(尊華攘夷) : 중국은 높이고, 상대국가는 깎아 내린다. 상내약외(詳內略外) : 중국 안의 일은 상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간략하게 기록한다. 위국휘치(爲國諱恥) : 나라를 위하여 수치스러운 일은 철저히 감춘다 |
사마천 이하 역대 중국의 사가들이 춘추필법에 의거하여 역사를 기록한 결과, 동북아 문명의 주체였던 한민족 역사는 중국 변방 오랑캐 족속의 하잘 것 없는 역사로 왜곡되고 말았다. 사마천 사기에 보면 조선에 대한 정확한 명칭도 안나온다. 숙신, 쥬신, 발 등등 애매하게 나온다. 동이족에 대해서. 사마천이 우리 민족 국가에 대해서 굉장히 깎아내리고 그 실체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고조선의 제후국 이름들로 썼다. 조선도 인정을 안하는 사마천은 배달국 또한 인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중국역사기록에도 ‘청구’라는 기록은 등장한다. 청구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치우천황께서 영토를 광대히 넓히신 이후 이전한 수도의 이름이다. 배달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청구’를 통해 배달의 존재를 알 수 있다. 또한 1920년대 발견된 홍산문화는 배달국으로서만 해석이 가능하다. 국가형성의 기본 조건을 갖추고 있는 홍산문화를 설명하는 문헌이 다른 어떤 사서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고학적 유물이 시간이 흐를수록 드러나며 환단고기를 점점 입증해 주고 있는 상황이다.
삼국유사에는 요나라가 생겼을 때 단군조선이 생겼다고 한다. 요나라 왕이 생기고, 고조선 단군이 즉위하고. 왕이 없다가 어느 순간 툭 튀어나오지 않는다. 먼저 왕이라든지, 어떤 국가의 세력이 존재했을 거다. 조직론적으로 보면 당연한거다. 서자환웅에서 서자를 무리로 해석할 수 있다. 아들의 모임 수장인 환웅. 환웅이 서자라는 조직의 우두머리이면 그 전에 또 어떤 조직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직학 하시는 분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다.(배재대 손성태 교수)
그리고 환국에 대한 명칭은 우리나라 다양한 고전에 많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배달은 신시神市라는 명칭으로 많이 언급된다.(환단고기 역주본 해제 150 페이지 참조)
* 청구(靑邱)는 '동방의 나라'라는 뜻이며 우리나라의 별칭인데 예로부터 중국인들은 동방의 우리나라를 가리켜 '청구국(靑邱國)'이라 불러왔다. 청구는 본래 배달국을 지칭하는 말이다. 초대 황웅천황이 백두산의 신시(神市)에 도읍한 이래 13세 환웅까지 계속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다. 신교의 오행철학에서 동방(3.8木)은 청(靑)색을 상징하므로 동방에 위치한 우리나라를 '동방의 나라'라는 뜻으로 청구국이라 한 것이다.
* 우리 민족을 예로부터 '배달'이라 불러온 까닭은 배달이라는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달국은 전기의 신시시대와 후기의 청구시대로 나뉜다. 신시시대는 고고학적으로는 후기 신석기(홍산문화)시대로 체계적인 국가조직이 나타난 시대이다. 요녕성 능원현과 건평현 등에서 발굴된 유적에서는 정교한 옥기와 돌무지 무덤, 여신상, 사당 건물터가 발굴되었고 능원현 남성자와 적봉에서는 성터도 발굴되었다. 동일 문화권이라 할 수 있는 만주 좌가산 유적에서도 홍산문화의 그것과 흡사한 유물들이 출토되었고 신락 유적에서는 가장 오래된 봉황문(鳳凰紋)조각이 발굴되어 주목을 받앗다.
배달의 실존을 기록한 문헌들
배달국의 ‘신시’를 기록한 문헌
<삼국유사>
일연 1206~ 1289
古記云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권1 기이1 고조선(왕검조선)>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
유희령 1480~ 1552
檀君 姓桓氏 名 王儉 ..... 有神人桓因之子 桓雄 ..... 謂之神市 在世理化
<권1 전조선>
<신증동국여지승람>
이행 홍언필 1530
太佰山(古記 昔有天神桓因 名庶子雄 ..... 謂之神市 主人間三百六十餘事)
<권54 평안도4 영변대도호부 고적 태백산)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문해 1534~1591
昔有神人桓因 名世子桓雄 ..... 謂之神市將風伯雨師雲師 .....
<권9 상성 지 지 신시>
<기언記言>
허목 1595~1682
上古九夷之初 有桓因氏 桓因生神市 始敎生民之治 民歸之神市 生檀君.....
<권32 외편동사1 단군세가>
<약천집藥泉集>
남구만 1629~1711
..... 云昔有桓國帝釋庶子桓雄 受天符印三箇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제29잡저 동사변증 단군>
<해동이적>
홍만종 1643~1725
..... 有桓因釋庶者 名庶子桓雄 ..... 民歸如市 因號神市 將風伯雨師雲師
<하(보)단군>
<규원사화>
북애자 1675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說敎 ..... 神市氏
<태시기>
<수산집修山集>
이종휘 1731~ 1797
..... 故桓雄爲神市天皇 而雄之子號檀君云 神市之世 以神說敎
<권12 동사 지 신사지>
<동사강목>
안정복 1778
古記云 ..... 庶子桓雄下視三危太伯可以弘益人間 .....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
<부권상중괴설변증>
‘청구’를 기록한 문헌
<규원사화>
북애자 1675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 曰靑丘國 宅樂浪忽
<태시기단군기>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150~151쪽
배달국의 유물로서 현재 출토된 것이 없다?
⇒ 대표적인 유적은 5500여년 전 만들어 진 것으로 밝혀진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이다. 홍산문화는 요서지역(발해연안 지역)에서 발견된 신석기․ 청동기 문화이다. 1919년 프랑스인 에밀 리쌍이 내몽골의 적봉을 1차 방문하고, 1922년부터 그곳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을 발견한 이후 요서에서는 현재도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세기 초부터 프랑스인 에밀 리쌍등이 발굴하기 시작해서 중국에 문화대혁명이 지난 1980년대부터 대대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우하량 유적에는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적석총군積石塚群이 나왔다. 총묘단塚廟壇이 함께 나왔다는 것과 최고 통치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묘를 주변의 작은 무덤들이 에워싸고 있는 것을 볼 때, 훙산문화는 이미 씨족사회를 넘어선 계급이 분화된 국가단계의 문명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직경이 100m가 넘는 돌로 쌓은 대형 피라미드도 발견되었다. 홍산문화의 출현 연대는 지금부터 4천여년 전에서 최고 85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으로 꼽히는 수메르 문명이 약 5천5백년전에 시작한 것에 비하면 홍산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적에서 나온 돌무지무덤 양식등은 중국 내륙에서 발견되지 않는 우리민족의 무덤 양식이다.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 발견되는 고분들도 돌무덤이다. 속에 목곽을 설치하고 그 위에 적석을 한 후 흙으로 덮은 적석목곽분이다. 가야의 무덤도 전부 돌무덤이다.(상생방송STB 역사특강,<발해연안문명,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이밖에도 많은 부분들이 홍산문화의 주인공이 우리의 조상임을 설명해 주고 있다. 우하량에서 나온 여신전女神殿 터에서 여신상과 함께, 이 지역 사람들의 토템신앙을 보여주는 곰 소조상과 새 소조상이 발굴되었다. 그들의 곰 토템은 우하량만이 아니라 인근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옥으로 만든 곰 형상물’에서도 보인다. 이는 곰(웅족)과 호랑이(호족) 토템 문화로 우리 민족의 이야기임을 환단고기에서 전하고 있다.
세계 4대문명보다 오래된 문명 : 요하문명(홍산문화)
세계 4대문명보다 오래된 문명의 등장으로 4대문명의 판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역사 교과서는 황하-메소포타미아-나일-갠지스 강 문명을 세계 4대 문명으로 불러왔습니다. 중국은 중국의 뿌리는 황하문명이라고 주장을 해왔으며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만리장성 서북쪽 1000여km 지점에서 실로 놀라운 고대 문명이 발견되었습니다.
요하 상류지역에 그보다 최소 1000년 이상 앞선 고대 문명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를 근래 들어 ‘제5의 문명’이라고도 부르고 '요하문명'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유물과 유적을 검토해보니 분명히 중국문명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상식처럼 알았던 중국문명(황하문명)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명이라고 해야 한다고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만리장성을 늘리는 이유? 중국은 만리장성 이북은 ‘오랑캐의 땅’으로 “문명이 없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이제 그 문명을 자기네 문명이라고 주장해야 하니 만리장성을 엿가락 처럼 늘릴 수 밖에없는 이유가 되는거죠
만리장성은 실제로 (중간에 갈라져 나온 가지를 모두 합하여) 6,400km 정도입니다. 8,851km라는 만리장성의 길이는 새로발표한 동단지점까지(원래는 고구려박작성임) 포함한 길이입니다. 즉, 중국의 동북공정의 논리를 몰랐던 방송국의 오류죠. 2011년 9월 18일 방영된 런닝맨 북경특집은 이런 커다란 오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요하문화와 중원의 문화는 이질적인 면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요하문명을 주도했던 세력, 그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을까?
홍산문화(요하문명)이 우리 한민족의 상고시대 도시국가라는 증거
1. 적석총 - 장례문화는 민족의 고유 사상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돌무지무덤'이라불리는 적석총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무덤형태입니다. 중국한족은 토광묘를 씁니다.
* 적석총, 고인돌 등 거석문화는 우리문화입니다. 근래 학자들은 거석문화가 태양신숭배와 연관되있다는 말을 합니다.
<우하량 적석총 복원도 :우하량 근처에서 발견된 한변 100m의 거대한 적석총, 이집트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천년이 앞선다. 거대한 건축믈들을 쌓으려면,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급과 사회분화가 이루어진 강력한 제정일치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2. 수암옥 - 홍산과 흥륭와 문화(BCE 6200년)에서 발견된 옥기의 재질은 수암옥입니다. (압록강 바로 위, 수암) 같은 요하문명인 흥륭와에서 나온 옥귀걸이와 동일한 형태가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 6천년경으로 추정되는 발견된 흥륭와옥귀걸이, 사해옥귀걸이, 고성문암리 옥귀걸이의 모양이 모두 같은 것은 그 당시 이 세지역이 서로 단일 문화권이라는 증거이다
3. 웅녀상 - 곰을 大地의 神으로 인식한 것은 한민족 고유의 토템입니다.
<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여신상> <여신묘 곰발바닥 소조>
* 웅녀상은 여러 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상신 숭배로 보여집니다. 웅녀국의 후예들이 아닌가 생각되며 특이한 것은 여신상이 너무나 사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나타낸것인데, 이것은 '神化된 인간'을 숭배한 것으로 인격신을 섬겼던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도 맞습니다.
4. 용봉문화 - 천자문화와 연관되있는 것으로 '채옹'도 인정했듯이 천자문화는 한민족으로부터 나온 문화입니다.
5. 역사기록 - 요하문명이 나온 곳은 후에 고조선의 강역입니다. 고구려때까지 우리 땅이었던 곳으로 상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의 주 활동무대입니다.
이 곳에 도시국가가 있었다는 기록은 너무도 당연히 환단고기에 나오는 배달국 신시밖에 없습니다.
6. 유전자분석 - 홍산문화에서 나온 유골을 mtDNA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 35.71%가 16172라는 하위 변이에 속하며 이는 중국한족에서는 잘나타나지않고, 대부분 우리 현대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에서 나타나는 변이입니다. 실제로 현대 한국인중 일부는 이 유전자변이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만약, 'N9a-16172'라는 유전자변이형태를 가진 분이 있다면 이분들은 웅족의 직계후예입니다. ^^ 우리나라에는 6~7%가 N9a이라는군요.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 유골 mtDNA분석 결과 http://yayul.egloos.com/2426041
"황허문명은 농업 중심의 왕권국가였고, 랴오허 문명(발해문명)은 복합적인 신권국가였던 것 같다. 차하이·싱룽와 문화(BC 6000년 전)에서 홍산문화(BC 4500~BC 3000년)에 이르기까지…. 용형 돌무더기와 옥결이 출현하고(차하이·싱룽와) 곰과 용, 새를 형상화한 옥문화가 꽃피고, 신전과 제단, 적석총 등 제사유적이 출현하고(훙산문화)…. 신권 중심의 문화였다.” - 徐子峰 교수
7. 빗살무늬토기
중국학자들은 황하 지역과 전혀 다른 요서 지방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밝히고 있다.
중국학자 '왕혜덕'이나 조선족 대련대학 '유병호' 역시 요하문명의 특징은 빗살무늬 토기와 조상 숭배 풍속이며, 대련대학 '설지강' 역시 흥륭와 문화의 특징은 빗살무늬(지(之)자문) 토기라고 주장하였다.
중국학자 '풍운학'은 지(之)자문(빗살무늬) 토기는 요서 일대(요서 문명)와 흑룡강 중·하류 지역, 한반도, 일본 등지에서 발굴되는데 이들은 모두 같은 문화권이라고 주장하였다.
요하 일대에서 발굴되는 빗살무늬 토기는 중국 중원의 황하 일대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북방 계통의 문화이다. 요하 문명의 주도세력들은 중원에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빗살무늬가 전파되는 길로 이동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결국 BC 6000년 당시 부터 만주와 한반도 그리고 요서 지방과 발해만 연안은 중원과 다른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 문화는 결국 예·맥족(고조선과 고구려)으로 이어졌다
빗살무늬 토기들이 나온 곳들을 살피면 이른바 발해문명권, 다시 말해 중국인들이 말하는 동이족의 영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인(人)자형은 한반도 압록강·대동강·재령강·한강유역은 물론 두만강과 동해안, 그리고 남해안 등 전국적으로 분포되고 있어요. 지(之)자형은 평북 의주읍 미송리 동굴유적, 경남 통영 상노대도, 김해 수가리 유적에서 보이고…. 빗점무늬는 대동강의 궁산·남경유적, 재령강의 지탑리 유적, 한강유역의 암사동 유적, 동북부의 서포항 유적 등에서 확인됩니다. 한반도 전역을 포함한 발해연안이 바로 빗살무늬 토기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죠.”(이형구 교수)
또한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옥결(옥귀고리)이 나온 강원 고성 문암리(BC 6000년)와, 양양 오산리(BC 5000년)에서는 초기 신석기 문화의 양대토기인 덧띠무늬 토기와 빗살무늬 토기가 함께 나오기도 했다. 문암리 유적을 발굴한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연구관은 “차하이-싱룽와에서 나온 유물을 본 결과 문양을 그려넣은 기법이나 토기의 기형이 문암리와 상당히 유사하다”면서 “발해연안과 한반도가 같은 문화권임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보았다.
글출처 : 코리안루트를 찾아서 (7) - 빗살무늬 토기문화 경향신문 2007년 11월 16일
“전형적인 북방문화입니다. 그것은 한반도로 해서 일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요하문명은 동북아시아의 시원문명임과 동시에 주요한 세력들은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지는 북방문화 계통이라는 것입니다.”_ 우실하 교수
“요하일대는 우리민족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 범위도 요하를 훨씬 벗어나서 요동반도와 한반도에 이르는 발해연안벨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요하문명이라고 한정해서 말하기보다는‘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_ 이형구 교수
발해연안문명(요하문명,홍산문화) 흐름도
배달의 14대 자오지 환웅천황, 치우
‘환국(환인)-배달(환웅)-조선(단군)…’으로 내려오는 한민족사의 국통을 보면, 3301년간 일곱 분의 환인천제가 다스린 환국을 이어 배달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다. 그 배달국 당시,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배달국을 다스린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이 곧 치우천황이다. 치우(蚩尤)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지어 산천을 바꾼다’는 뜻이다,
당시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쇠퇴의 길을 걷자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정벌하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킨다. 이 때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치우천황의 입성소식을 듣고,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이에 대항해 온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동방 최초의 국제전쟁)가 벌어져, 10여 년 간 무려 73회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고간다. 치우천황은 도술로 큰 안개를 지으며 최초로 제작한 금속병기를 동원하여 마침내 대승을 거두고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는다.3)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東夷)라고 부른 것도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 때부터이다. 이후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武神)의 시원이 되어 수천년 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나라 진나라의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된다.
치우에 대한 역사왜곡, 사마천의 『사기』
탁록의 대결전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몰살당한 사실이 있다. 이것을 두고 훗날 고조선과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한 한무제와 그의 사관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았다.
또 당시의 상황을 “치우작란”(蚩尤作亂), 즉 치우가 헌원에게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후의 위치에 있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해온 것이니, “황제작란”(黃帝作亂)이라 함이 역사의 진실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헌원은 황제로 격상되어 지존의 존재, 하늘과 같은 존재로 떠받들어 놓고, 치우는 수신인어(獸身人語, 짐승 몸에 사람 말을 함)로 묘사되어 짐승 같은 존재, 요술부리는 아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켜 놓았다. 근원적인 역사왜곡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치우천황은 우리민족과 관련 없는 사람이다. 묘족의 조상으로 모셔지고 있는 분이다?
⇒ 환단고기에는 우리민족의 조상으로 나온다. 환단고기 이외에는 치우가 우리민족의 조상이라 전하는 고유사서가 거의 없다. 그것은 고유사서들이 강탈되어 그런것이다.
치우를 우리 민족이 모셔온 흔적은 [둑신사纛神祠]라는 절에서도 찾을 수 있다. 『둑』은 <독 또는 도>라고도 읽는다. 일제시대 말까지 동대문밖 <뚝섬>에 있었다고 하는데 [뚝섬]의 <뚝>자字는 바로 <둑>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치우蚩尤와 황제黃帝가 싸움을 한 [탁록전涿鹿戰]의 대형벽화가 있었는데 길이 36자-높이 6자 정도라고 하니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방을 전후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민속 곳곳에 남아 있는 [치우蚩尤]에 대한 신앙이 돋보이고 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를 보면 단오 날 <적두적설赤두赤舌의 부적符籍>으로 백병百病을 쫓는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치우부적蚩尤符籍]으로 [둑신묘纛神廟-둑신사纛神祠]에서 전달되었다. 조선 조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으로 특별하게 인식한 군신軍神 치우蚩尤에게도 꾸준하게 제사를 올렸다. 이름 하여 [둑제纛祭]로 [둑소제纛所祭]의 준말이다. 일 년에 두 차례 정기적으로 지냈는데 무장武將들 또한 임지任地로 떠가기 전에는 반드시 둑신纛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고려시대에도 [둑제纛祭]를 지냈다는 기록을 <고려사高麗史>에서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다.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祠堂이 바로 둑신묘(纛神廟-둑신사纛神祠)로서 <둑도纛島> 즉 [뚝섬]에 있었다. [뚝섬]이란 명칭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 유래되었다. 이렇듯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하게 군영軍營을 대표하는 대장기大將旗로서 [치우蚩尤]의 상징이라고 전해지는 [둑纛]이라는 깃발을 [둑소纛所]에 둔 뒤 매년 갑옷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묘족은 <머리채를 삼끈으로 묵은 상투쟁이로서 마치 싹이 돋은 듯하여 苗라 했다-회남자淮南子 권11 제속훈> 라는 구절과 <산해경> 권 17 대황북경에 <서북해 밖 흑수 북쪽에 날개달린 사람(鳥夷系)이 있으니 이름하여 苗民이다>란 기록에 비추면 이夷족이면서 머리에 상투를 튼 민족이다. 그리고 <삼묘족三苗族의 나라를 구려九黎라 하고 구려의 임금을 치우라 한다-왕동령王桐齡 중국민족사>라는 구절이 있다. 즉, 묘족은 우리와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오히려 묘족이 있던 영역까지 배달국의 영역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도 있고, 환단고기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추정들이 사실임이 밝혀진다.
또한 『산해경』에는 양자강 이남의 동정호와 팽려호 일대에는 구려九黎의 후예인 ‘유묘有苗’혹은 ‘삼묘三苗’라고 불리는 부족이 있었는데 단주(요임금의 아들)와 사이가 매우 가까웠다. 마침 요임금이 순에게 제위를 넘겨준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승복하지 않고 있던 삼묘의 족장은 단주가 오자 곧바로 세력을 연합하여 요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러나 요의 군대는 단주와 삼묘의 연합군을 궤멸시켰고, 이 싸움에서 삼묘의 족장이 피살당하고 단주도 전사하였다. 이것이 묘족이 남쪽으로 옮겨가게 된 배경이라고 했다.(이재석,『인류원한의 뿌리단주』,상생출판,2008)
중국의 사학자 추군맹은
“華夏族是在我國原始社會末期, 以中原炎黃集團爲基礎, 融合了東方一部分夷人集團(主要是蚩尤和少昊這一支) 和南方一部分苗蠻集團(主要是女氅●和槃瓠這一支) 而形成的(華夏族起源考論)”
“화하족시재아국원시사회말기, 이중원염황집단위기초, 융합료동방일부분이인집단(주요시치우화소호저일지) 화남방일부분묘만집단(주요시여창●화반호저일지) 而形成的(화하족기원고론)”
이라고 한 바와 같이 중국민족 곧 화하족은 이른 시대에 이미 東方의 蚩尤(치우)와 少昊(소호)가 지배하던 이인집단이 융합되었다고 역설하였다.
蚩尤에 대해서도 추씨(鄒氏)는 역대 학자들의 고증을 들어 구려(九黎)의 군장으로서 동이집단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少昊에 대해서는 확실히 蚩尤의 후예로서 새를 토템으로 한 씨족부락이었으며, 그 발상지는 산동성의 곡부 일대이며, 약 5000여년전의 유적지인 「대문구문화」(山東省)는 곧 少昊의 집단인 東夷族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고증하였다.
蚩尤에 대하여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별로 연구된 바 없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少昊에 대해서도 中國의 五帝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반하여,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그 무덤까지 확인하고 분명히 東夷集團의 君長이었음을 역설하고 있음은 우리의 역사지식을 반성하게 한다.
참고 : 뚝섬의 유래
서울시, 뚝섬에 ‘유래비’ 설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는 시민들에게 뚝섬의 유래를 알려주기 위해 19일 뚝섬 한강공원에 뚝섬 유래비를 설치했다고 21일 밝혔다.
뚝섬은 한강과 중랑천으로 둘러싸인 살곶이벌(箭串坪) 일대로 무신(武神)을 상징하는 `치우천왕'의 모습을 본떠 큰 창에 소의 깃털을 꽂아 만든 깃발인 독 또는 둑(纛)과 관련된 지명이다. 뚝섬은 조선시대 국왕이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이곳에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냈던 곳이라 뚝섬으로 불리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뚝섬 유래비는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2번 출구에서 내려 뚝섬 한강공원 광장으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2007년 09.21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중 3번 치우천황께 둑제를 올렸다. (난중일기)
① 癸巳(1593)年 2月 初4日 : 경칩날이라 둑제를 지냈다.
② 甲午(1594)年 9月 初8日 : 장흥부사로 獻官을 삼고, 홍양현감으로 典祀를 삼아 초아흐레 둑제를 지내기 위해 入齋시켰다.
③ 乙未(1595)年 9月 20日 : 새벽 2시에 둑제를 지냈다.
<역사사전>과 <국어사전>에 보이는 '둑'에 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大駕의앞또는軍中에서大將앞에세우는旗의일종.큰三枝槍에붉은삭모를많이달았으며,행진할때에말을탄장교가받들고,군사두사람이나혹은네사람이벌이줄을잡고다녔다.」
중국 역사교사의 양심선언 "중국 역사교과서는 완전한 허구"
중국의 유명 역사 교사가 중국 공산당이 '신중국 건국의 아버지'로 떠받드는 마오쩌둥 전 주석과 중국 역사교과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동영상 강의를 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 7일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에 따르면, 베이징(北京) 징화(京華)학교의 역사담당 교사인 위안텅페이(袁騰飛·사진)씨는 중국 관영 중앙(CC)TV의 역사 강의 시리즈 '북송과 남송의 흥망성쇠' 등을 진행하면서 최고의 프로그램 시청률을 기록했고, 중국 고교 역사 교과서의 공동 집필자이자 대학입시 역사 과목의 출제위원이기도 하다.
동북공정(東北工程) 등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도 정면으로 지적했다. 그는 "일본도 역사교과서를 왜곡하지만 중국만큼은 아니다"면서 "중국 역사 교과서에 기술된 내용 중 진실은 5%도 되지 않고 나머지는 완전한 허구"라고 주장했다.
중국 정부의 아킬레스건 '저우언라이 1963년 발언록'
한심한 것은 2년전 중국의 <동북공정> 1차 침공때 한방에 중국정부를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었던 주요 문건의 존재를 우리 정부가 까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13억 중국인들이 마오쩌둥(모택동)보다 더 존경하는 저우언라이(주은래:1898-1976)가 생전에 중국 국수주의 사학자들의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왜곡을 통렬히 비판했던 귀중한 발언록이 그것이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조선관계 대화>라는 제목의 중국정부 발행 문건은 당시 중국 베이징대학에 연수중이던 설훈 전 의원이 발굴, <동북공정>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2004년 8월13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www.sh21.or.kr)에 띠움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됐고, 그후 중국정부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까지 감히 저우언라이를 부정할 간 큰 중국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북공정>과 관련한 중국과의 싸움에서 <저우언라이 문건>은 더없는 전가보도이나, 우리 외교부는 이 문건의 존재조차 까맣게 잊은듯 수동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어 개탄을 낳고 있다. -> 전문출처 : http://goo.gl/VFs8W
"주은래는 1963년 중국을 42일간 방문한 북한 조선과학원 대표단 20명과 만난 자리에서 “역사는 진실성이 있어야 하고 그러므로 왜곡해서는 안되며,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다거나 심지어 고대부터 조선도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설파하면서 중국의 팽창주의로 고대 한국의 영토가 침탈된 데 대해서도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부쳐 작게 만들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까지 말했다"(프레시안 2004-10-02 )
이런때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나라는 존재해왔지만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조선시대 성리학적 질서를 벗어난 민족 자주적 사상은 사도난정으로 규정되어 자주적 역사를 펼치지 못하였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그들의 역사콤플렉스 때문에 우리나라 고조선을 비롯한 상고역사를 신화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영원히 식민지화 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프로젝트는 성공하였습니다. 해방 후 친일청산이 안되었고 우리는 지금 일제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그대로 배우고 있습니다. 때문에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독도침탈에 올바른 대응을 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논리에 동조하며 도움을 주기도 하는 형편입니다.
역사를 몰라도 당장 사는데 지장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런 첨단 세상에 왜 케케묵은 역사를 알아야 되는가? 무슨 도움이 되나?’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역사를 모르면 나와 우리 민족의 미래는 없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과거 역사가 만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모르면 현재를 진단할 수 없고, 미래를 준비할 수도 없습니다. 역사를 모르고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누군지 나의 뿌리와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진정한 한국인으로 살려면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우리의 뿌리 역사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모든 한국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일입니다.
우리 역사의 현실을 개탄한다
구소련의 역사학자 "유엠 푸진"은 신시 배달국을 이은 "고조선은 최소한 1000년의 세월 동안, 중국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문화를 발달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방의 학자도 이 정도는 알고 인정하는데, 정작 후손된 우리는 근 2천 년 동안 외래사상에 오염되고 역사의식이 완전히 고갈된 나머지, 실존했던 조상님의 이야기를 "호랑이와 곰의 신화"로 치부하면서 제 뿌리를 부정하고 있다. 이 땅에는 3,600여 년에 달하는 신시배달, 고조선 역사의 알맹이와 그 멸망 과정의 진실이 모두 증발되어버린 엉터리 역사서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현행 초중고교 교과서를 보면, BCE2333년 단군의 건국 사실은 언급하면서 정작 개국조 단군은 실존 인물도 신화의 주인공도 아닌 애매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 또한 한반도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유물이 BCE 10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이유로 삼아 BCE 23세기 고조선 건국이라는 문헌상의 연대를 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학계는 "역사를 이끌어간 주체가 전혀 없는 유령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고조선은 신화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을 신화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국사교과서를 보면 당연한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국사교과서를 보면, BC 2333년 고조선 건국 이후 역사의 건국주체인 주인공 이야기가 모두 빠져있습니다. 나라를 통치해온 역대단군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생활, 문화, 풍습, 대외관계가 서술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단지 BC194년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을 계승하였고 그 이후 BC108년 한무제에 의해 멸망당했다고만 설명되어 있습니다. 두페이지 남짓 짧게 서술된 교과서를 보면 고조선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신화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어떤 민족을 멸망시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라는 것이 식민주의자들이 철학이다” 이 말을 가장 잘 지킨 나라는 일본입니다. 일제 식민지 정책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크게 중점적으로 왜곡된 부분이 우리 상고사입니다. 식민지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었고, 고조선은 한반도 내에만 존재했고 그 또한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이 일본 어용학자들에 의해 뿌리 깊게 설파됩니다.
일본 사학자 동경제국대학의 사라도리 교수는 AD 1984년 『단군고』에서 단군사적은 불교설화에 근거하여 가공한 선담한 일이라고 하며 단군조선을 부정합니다. 그 이후 많은 일본인 사학자들은 그의 이론에 동조하며 고조선사를 신화로 만들어버립니다. 단군신화에서 ‘곰이나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였던 부족’이 아닌 단순한 곰과 호랑이라고 해석합니다. 신화에 담긴 축약적인 의미를 잘 파악하여 역사적 사실을 간파하지 않고, 말 그대로 신화로 만들어버립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민족은 모두 곰의 자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트로이의 발굴처럼 세계적인 대발굴의 시발점은 신화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단군신화를 제멋대로 해석하여 18대 환웅과 47대 단군의 실존역사는 환인의 아들 환웅, 환웅의 아들 단군의 3대이야기로 변색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환단고기를 보면 역사의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환웅’이나 ‘단군’은 한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닌 왕을 뜻하는 호칭이었습니다. 18명의 환웅께서 1565년 동안 통치하신 국가가 우리민족 최초의 국가 배달이고, 47명의 단군께서 2096년간 다스렸던 국가가 고조선입니다.
중국은 홍산문화의 발굴에 놀라할 때 한국은 환단고기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
『환단고기』는 인류의 상고 역사, 그 중에서도 고대 동북아 역사의 실체를 밝혀주는 고귀한 역사 경전입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 뿐 아니라 인류역사의 잊혀진 원형문화까지 시원스레 들여다 볼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한마디로 한민족 고유사서의 완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 계연수(1864~1920)가,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사서들을 한권으로 엮은 책입니다. 안함로의『삼성기 상』, 원동중의『삼성기 하』, 행촌이암의『단군세기』, 복애거사 범장의『북부여기』, 이맥의 『태백일사』로 구성되어있고, 해학 이기의 지도 아래 계연수가 발간한 역사서의 결정판이 『환단고기』입니다. 이후 이유립 선생이 48년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여 남한에서 널리 대중화 시켰습니다.
환단고기는 강단사학계에서 고대사 대표적 사서로 꼽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발견할 수 없는 한민족 역사와 문화 참모습을 보여주는 신교문화의 정통사서입니다. 인류의 창세문명과 한민족의 뿌리역사 진실을 밝혀주며, 한민족사의 국통맥을 최초로 명확하게 바로 잡아줍니다. 한민족의 고유 신앙이요 인류의 시원종교인 신교의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 신교를 바탕으로 사람이 이 우주에서 어떤 존재인지 철학적으로 밝혀주기도 합니다. 또한 동방 한민족이 천자문화의 주인공이며 책력문화의 시조로서 수를 최초로 밝혔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고조선사의 비밀을 푸는 핵심열쇠인 ‘삼한관경제’에 대해 나타나고 있으며, 배달과 고조선이 창제한 문제를 기록하여 우리나라가 문자문명의 발원처임을 밝혀줍니다. 또한 상고시절 한민족의 대외관계가 드러나 중국과 일본 몽고, 흉노의 왕조 개척사까지 밝혀져 있습니다.
왜 우리 상고사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없었나?
물론 우리 상고사에 대해 말하는 책이 환단고기 뿐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수의 자주적 역사서는 수천 년 동안의 무수한 전란 속에서 화재로 소실되거나 외적에게 탈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 때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유가와 불가 사상에 벗어난 사서들이 대거 소각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중기 김부식의 대대적인 사료 수거와 소각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민족사의 허리가 잘려나간 결정적 이유 중의 하나로 꼽을 만큼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사서 소멸은 중앙 조정에 의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백 년 전, 조선 초기만 해도『삼성기』를 비롯한 10여 종에 달하는 한민족의 도가사서들이 민간에 널리 실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 때에 와서 성리학 중심의 통치이념과 사관을 구축하기 위해 유교문화에 부합되지 않는 전통사서와 도서들을 조정에서 모조리 수거합니다. 명나라를 황제로 모셔온 조선 사대주의 입장에서 우리나라 고유 사서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불온서적이었죠. 우리나라가 천자의 나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고유사서들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단지 책 이름과 저자 이름만이 기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화 사대주의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와 같은 내용들의 책은 조선시대 때 소장하고 있으면 참수를 당하는 책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조, 예종, 성종, 세 차례에 걸쳐 고조선비기, 대변설, 조대기, 주남일사기, 지공기, 표훈삼성밀기, 삼성기 등을 강제 수거한 내용이 나옵니다. 국왕 3대에 걸쳐 지속성을 가지고 행했던 원칙적이고 장기적인 국가 정책이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선시대의 어떤 학자도 이러한 사서를 인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 이후 고성이씨 가문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이맥의 손자 이방(李滂)은 1545년(인종 원년) 평안도 삭주도호부사로 삭주로 옮겨간 후 삭주에 정착하게 된다. 고성이씨 가문은 이방의 삭주도호부사 발령을 좌천성 인사로 보고 있다. 이후 인조대 ‘이괄의 난’은 고성이씨집안의 활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한 역사 사료는 조선시대 때 자료가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서수거령 이후에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양대 전란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우리 사서가 탈취, 소실되었습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가 행한 조선사 말살작전으로 총 51종 20여만 권의 서적이 소각 또는 인멸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자주적인 역사서들이 모두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환단고기』는 특히 더 가치가 있는 소중한 책입니다.